서울에 사는 64세 서 모씨는 매달 국민연금이 들어오는 날을 기준으로 생활비 계획을 짠다. 관리비를 먼저 빼고, 병원비와 약값을 계산한 뒤 남은 돈으로 장을 본다.
예전 같으면 노후 용돈쯤으로 여겼을 국민연금이 이제는 한 달 생활을 버티게 하는 가장 확실한 현금 흐름이 됐다. 은퇴는 소득의 끝일 수 있지만 지출의 끝은 아니다.
매달 나가는 관리비와 식비, 병원비, 약값은 은퇴했다고 멈추지 않는다. 오히려 나이가 들수록 의료비와 돌봄비 부담은 커진다. 100세 시대가 현실이 된 지금, 은퇴 후 20~30년을 어떻게 버틸 것인가는 개인의 문제가 아니라 사회 전체의 과제가 됐다.
국민연금의 의미도 달라져야 한다. 과거 국민연금은 노후에 조금 보태 받는 돈, 이른바 용돈 정도로 여겨지기도 했다.
그러나 길어진 노후 앞에서 국민연금은 더 이상 부수입이 아니다. 퇴직 뒤 급격히 줄어드는 소득을 메우고, 최소한의 소비를 이어가게 하며, 노후 빈곤으로 떨어지는 속도를 늦추는 기본 안전망이다.
최근 국민연금연구원의 중고령층 소비 행태 분석은 이 같은 역할을 뒷받침한다. 56~70세 중고령층을 대상으로 살펴본 결과, 국민연금 등 공적연금은 은퇴 후 소비 급감을 막는 데 효과를 내고 있었다. 특히 자산이 적은 계층일수록 연금 수급액 증가가 식비, 생활비, 주거비 같은 필수 소비 증가로 이어졌다.
이는 국민연금이 단순히 여유 소비를 늘리는 돈이 아니라는 뜻이다. 연금은 여행비나 취미생활비 이전에 밥상과 병원비, 난방비와 관리비를 지탱하는 돈이다.
은퇴 후 가장 먼저 필요한 것은 화려한 소비가 아니라 일상의 기본선을 유지하는 일이다. 국민연금은 바로 그 기본선을 지키는 역할을 하고 있다.
특히 저자산층에게 국민연금의 무게는 더 크다. 자산이 넉넉한 사람은 은퇴 뒤에도 예금, 부동산, 금융자산 등 여러 버팀목을 갖고 있다.
반면 자산이 적은 사람에게 매달 들어오는 연금은 곧바로 생활비가 된다. 연금이 줄면 장바구니가 가벼워지고, 병원 방문을 미루게 되며, 사회적 관계도 위축될 수 있다.
국민연금이 노후 소비 불평등을 완화하는 제도로 평가받는 이유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