어린 시절 부친 따라 집안 어른 장례식에 참석했을 때다. 고인의 딸도 며느리도 아닌 여인이 “아이고 아이고” 하며 서럽게 울었다.

한쪽에서 ‘곡비(哭婢)’라며 수군댔다. 통곡도 효도라던 시절, 주변 시선을 의식해 전문적으로 곡 하는 사람을 고용한 것이었다.

풍습이 많이 달라졌지만 여전한 장례식 풍경도 많다. 장례식장 문상객 상당수는 고인을 평생 한번도 보지 못한 사람들일 것이다.

상주와의 ‘눈도장’이라는 목적만 남았다. 이 풍습을 과감히 끊어낸 사례도 있다.

세벌식 타자기를 만든 안과의사 공병우 박사의 유언은 이랬다. “내가 죽으면 죽었다는 사실을 알리지 말고, 시신은 기증한 다음, 모든 절차가 끝난 후 죽음을 알려라.” 1995년 유족은 ‘무빈소 장례’를 치른 이틀 뒤에야 세상에 부고를 전했다.

사실 고인의 확고한 유언이 있더라도 유족이 이를 실행하기는 쉽지 않다. 차마 빈소도 없이 보낼 수 없다는 자식의 죄책감, 불효자라 손가락질 받을지 모른다는 두려움을 넘어야 하기 때문이다. ...